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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emical Rooms

앵포르멜

2023

​개인전

전시 제목:  CHEMICAL ROOMS

전시 기간: 2023.11.14 - 2023.12.2

장소: 앵포르멜 갤러리

 ( 서울 성동구 연무장길 28-8. 2F )

전시 서문 : 오웅진

사진 촬영 : 최철림

서로 연결된, 진동하는 끈과 공

 

                                                                                                                                                            글 오웅진

 

 

 

케미컬 룸스Chemical Rooms, 지금부터 이 방에 들어선 모두가 공범이자, 증인이다. 그리고 해당 글은 이 전시장에 들어선 여러분이 무엇에 대한 증인인지를 서술한다.

 

어떤 현상이나 속성을 정량적으로 나타내는 것을 물리량이라고 한다. 관련하여 미술과 관련된 가상의 물리량을 상상해보자. 예를 들어 회화의 속도에 대해 측정하고자 할 때 우리는 어떤 물리량을 집어들 수 있을까.

 

본격 회화에 앞서 이미지에 대한 정의로부터 그 힌트를 찾고자 한다. 미술에서 널리 통용되는 그것의 정의로는 크게 한스 벨팅 (Hans Belting) 그리고 미첼(W.J.T.Mitchell)의 경우를 대표적 사례로 들 수 있다. 가령 전자의 경우 ‘사람의 이미지, 즉 사람을 재현할 뿐만 아니라 사람처럼 대우받는 것. 그 자체가 경배의 대상이 되어 옮겨다니고 상징적 힘을 갖는 것’(Belting, 1990) 즉 그 자체(entity)로 동작하는 것들을 유형화한 것이다. 그리고 후자 미첼의 접근에선 행위성(agency)이 전면으로 등장한다. “이미지는 단지 특별한 종류의 기호가 아니라 역사의 무대 위에 있는 배우 같은 것”(Mitchell, 1986)이라 말한다. 배우는 직접 무언가의 단순 한 재현이나 배경을 넘어선다. 김지수의 이번 전시를 이해하기 위해선 약간의 정반합 과정을 거쳐야 한다. 작가는 이전에 보이드 (Void)라는 개념을 작업에 적극 활용해 왔다. 이것은 빈 공간을 뜻하는 건축 용어이면서, 동시에 에테르에 반하는 물리학 용어다.
 

혹자 그렇게 말할 수도 있다. 이미 공(空)간인데 빈 공간이라니. 그러나 실재가 그렇게 간단치 않다. 이 가능성을 전제하고 넘어가 는 게 김지수의 회화를 이해하는 것에도 도움을 준다. 페인터로서 보이드를 곁에 두고 작가 서사를 개진한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 은 길이다. 실제로 Void는 “Vacuus”라는 라틴어가 프랑스어를 거쳐 영어로 변환된 용례다. Vacuus는 Vacuum, 즉 진공에 관한 이야기다. 진공(眞空)은 인류가 매우 정량적인 실험을 통해 획득한 개념이다. 76cm의 수은, 10m의 물을 기반으로 우리는 에테르라 는 유사과학을 걷어내고 진공을 마주하게 됐다.

 

실제 양자역학에서 진공이란 ‘더 이상 에너지를 제거할 수 없는 상태’, 즉 Ground State를 일컫는다. 그러나 그 속에 아무 것도 없다는 뜻은 아니다. 양자역학을 위시하는 현대물리학의 의의가 있다면 거대한 관성에 맞서는 일이다. 선배나 기성, 혹은 쉽게 씻겨내기 어려울 것 같은 암흑 물질 앞에서도 이 학문은 보고자 하는 의지대로, 끝내 본다. 하여 진공에서 물질 너머 장field을 본다. 그리고 장 주변으로 크게 두 오브제가 맴돌고 있는데 그 둘을 여기 전시장, 그리고 작가의 화면에서 확 인할 수 있다. 끈과 둥근 공. 이것은 추측이 아니다. 문과 감성, 혹은 부르디외 냄새 나게는 장field이라 부르겠다만 이과 감성이라 면 플레이트(Casimir-plates)라 부르는 것이 좋겠다.(허나 그렇다고 이과 동네에서 field가 없는 것도 아니다.)

 

어떤 실험이 있다. 이것은 음의 에너지를 확인하기 위한 것인데 그것은 실제 인간의 설정으로 이런 비현실적 에너지(CasimirPolder force)가 현존하는지를 보는 과정이다. 물리에서 어떤 장은 둘러싼 공간 사이 연결된 ‘공’과 ‘끈’으로 차있다고 보며, 그 장 의 ‘세기’는 이러한 공이 있는 지점에서의 변위로 ‘시각화’ 할 수 있다고 정의한다. 서두에 언급한 회화의 속도, 그것을 측정하는 물 리량에 대해 언급한 까닭이 여기에 있다. 이러한 ‘음’의 발견을 좇는 이 젊은 장르는 일명 양자장론, 양자역학과 특수 상대성 이론 을 결합하려는 시도로 볼 수 있다. 여기서 젊다는 것은 다음과 같은 근거를 바탕으로 한다. 예를 들어 음의 물질이나 에너지를 철 학이나 몽상의 영역에서 공굴리고 가지고 놀았다면 마냥 좋은 장난감이었을 테다.

 

그러나 거대한 의미는 미세하게라도 현실에서 이 를 목격할 때 나온다. 유관하게 가령 물질보다 어둠이나 사운드 같은 비물질에 의지할 수 있는 미디어아트라면 외려 이 지점을 들 춰보는 데 유리한 지점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회화는 물감을 개어 아사천에 바르는 일이다. 물질에 추가로 물질을 덧대는 과정을 통해 음각의 지점을 엿보려는 시도는 무 척 고되고 지난하다. 김지수는 제 작업을 활자에 기대어 설명하는 타입의 작가가 아니다. 여기에는 복수의 이유가 존재하는데 하나 는 활자 언어로 드러낼 수 있는 세계 자체에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그녀가 늦은 새벽 지하 작업실에서 끊임없 이 칠하는 붓질을 통해서만 획득할 수 있는 수행적 세계가 있기 떄문이다. 그림이 글을 얻기 시작한 것은 비교적 근래의 일이다. 그림은 오랫동안 어떤 환영이나 너머의 것을 현실로 데려오는, 즉 무언가로부터 파생된 이미지를 소환하는 역할을 맡았다. 그러다 제 스스로 원형으로서 직립한지는 얼마되지 않았다. 종교나 신화의 힘에 기대지 않는 그림, 추상이나 초현실주의에 기대지 않는 그 림 같은 걸 말하는 게 아니다. 그러나 조슬릿(David Joselit)에 따르면 그림은 현실을 드러내는데 꽤 믿음직한 역할을 한다.(David Joselit, 2013) 어떤 측면에선 사진보다 더욱 그렇다.

 

계속 뚫으면 뚫린다. 우리는 보르헤스의 알레프에서, 은하 사이를 잇는 웜홀에서, 유리관 속 진공이나 양자장론 등에서 이러한 의지 를 본다. 김지수의 화면은 앞서 언급한 개념들과 유사한 성취를 목표로 한다. 이것은 마치 우주 바깥을 보려는 시도처럼 읽힌다.

 

그리고 이번 전시의 의의라면 이러한 보이드를 딛고 제 스스로 어떤 물질을 제안하는 실험실을 선보인다는 점이다. 그래서인지 지 난 화면에서보다 공간의 성분 같은 게 적극적으로 나선 모습이다. 끈은 더 내지르고 원은 한껏 관객 앞으로 다가섰다. 하여튼 모든 게 시루 덕분이다. 그녀가 위층에서 기다리고 있지 않았다면 작가는 칠흑 같은 새벽 내내 홀로 지하 작업실에서 끝 모르고 그리다 결국 우주의 피막 한쪽을 찢어냈을지도 모른다. 그러니 시루가 우주를 구한 것이다. 참고로 시루는 작가가 키우는 리트리버다. 어디 선가 그 이름이 되찾아오는(Retrieve) 존재라고 들었다. 그리고 우리는 작가가 붓과 물감으로 구축한 방에 들어서는, 그리고 케미 컬을 매개로 작가가 그 너머 피막을 찢어보려한 어떤 회화적 사건을 함께 목격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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